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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오던 비행기에서 무아지경으로 자다 벌떡 일어나서 쓴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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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생각한다. 믿는다. 이 싸움의 승리자는 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승리한다.

비록 그 길이 너무 험하고 힘들지라도 이 방향이 맞기에, 우리는 이길 수 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페미니즘을 하는 세상이 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높은 곳으로 진출한 여성과 세수가 귀찮아 그냥 나온, 브라를 하지 않은 여성부터 평소 못 입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 온갖 욕망을 숨기지 않고 꿈을 꾸고 행동하는 여성까지 어떤 형태의 여성이라도 흔한 세상이 반드시 온다.

이 생각을 계속 되내인다. 이 길이 맞다고, 내가 맞다고 하루에도 여러번 나를 다독인다. 내가 지금 당장 보잘 것 없어도 난 좀 더 나아질 것이고, 세상도 함께 그럴 거란 자기 암시를 계속한다.

이것만이 이 무간도를 버티는 유일한 힘이다.
우린 이미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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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안대를 올리고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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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여성으로 최소한을 보장 받을 수 없음에 끝없이 실망하고
바꿔보려는 발버둥이 언제 빛을 받을 지 몰라 또 다시 고꾸라진다.

나라는 아직도 꼴이 아니고 기대하던 세계는 개떡같고
나는 도망치거나 숨을 수도 없고 더 올라갈 수도 없다.

내가 우울을 느껴서가 아니라 절망에서 허우적대다 죽어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밤이다.


 

외로워. 외로워 미쳐버리겠어.”


  20살 때 내가 매일매일 외치던 말이었다. 길에서 한가하게 걷고 있는 아무나라도 붙잡아서 남들 다하는 연애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나도 남들과 같은 경험을 하고 집단에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와서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는모태솔로는 비정상이라고. 학기 중과 방학 때를 가리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할 기회를 찾아다녔다. 미팅과 소개팅을 반복하다 마침내 드디어 시작한 연애는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았고, 남들과 비슷하게 행복하고 힘들었다. 그런 쉬운 연애를 끝낸 뒤 다음번 연애는 금방 올 거라 믿었다. 한 번 해보았기 때문에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기도 했다. 모두들 사람을 만나면서 사람을 배워 나가는 거라고, 그게 연애의 장점이라고 하니까. 그러나 한 번에 너무 온 마음을 쏟아서였는지 꽤 지쳤었다. 몇 명의 사람을 잠깐씩 만나도 전처럼 흥미가 생기지 않아, 나는 다시 10대 때의 나로 돌아갔다. 좋아하는 연예인 영상을 보고 연애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나로.


 이 때부터 사람을 거르기 시작했다.  나와 성향이 맞는 사람, 나를 이해주는 사람은 남기고 아닌 사람은 조금씩 거리를 두며 모두 쳐냈다. 거름망 작업을 마치고 나니 내 주변 환경은 매우 만족스러웠고, 아늑했다. 고민을 말하면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들, 연애는 언제 할 건지 앞으로 취업을 위한 체계적인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지 않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나는 온전하게 독립된 인간이 가지는 안정감을 느꼈다. 세상엔 다양한 삶과 선택이 있다는 큰 전에 아래서 나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해서 패배한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엄한 상대를 만나 힘들게 연애를 하면서 혹시 모를 범죄 위협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솔로의 삶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이 생각은 하루걸러 보도되는 여성 대상 강력범죄 사건으로 점점 강화되었다. 이로써 나는 현시대의 젊은이 세대가 갖는 새로운 비혼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생각에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외롭다고 끊임없이 말하고 다니던 사람이 한순간에 완전히 바뀌는 게 가능한 일인가?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나에게 물 밀듯 밀려와서 그냥 꼼짝없이 당한 건 아닐까? 연애하지 않는 사람이 패배자란 생각에서 연애에 목매는 사람은 독립적이지 못한 의존자란 생각으로 바뀐 건 나를 방어하기 위한 구차한 자기변명이 아니었을까? 유행에 따라 신발을 사듯 요즘 트렌드에 맞는 생각을 끼워 넣고 사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이 꼬리를 이어 며칠 내내 의심스러운 생각만 하다 올봄에 읽었던 한병철의에로스의 종말이 떠올랐다. 현시대는 이전의 사랑의 개념이 멸종하고 근대의 개념과 사랑이 합쳐져 다른 사랑을 추구한다고 한다.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멂과 같은 개념은 더더욱 멀리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효율과 안락이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랑하면 안락한 감정이 들어야 하고 이것이 올바른 사랑이라고 느낀다는 것. 이것은 나에게 오는 한 사람을 나와 다른 타자인 채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본래의연애한다라는 개념은 지금까지는 잘 모르던 사람을 갑자기 보고 싶어 하고,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일상의 끝없는 반복 속에서 연애는 거대한 드라마다. 마치 하나의 영화가 흑백으로 시작해 갑자기 중반부에 컬러로 바뀌고 결말에서는 화면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끝나는 이상한 상영방식처럼 말이 되지 않지만 흥미로운 일이다. 나에게 미지의 세계를 모험해야 하는 문이 열린다. 그 문 너머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청명할 수도 있지만, 때때로는 우박이 떨어지고, 다시 낮이 오지 않을 것처럼 밤만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은 문지방을 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에로스의 종말에서 나오는 현대의 사랑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처음 학교에 입학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실수하지 않는 연습을 끊임없이 훈련 받고 연습했다. 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왔다. 체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방식만이 유일한 답이라 생각하고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고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 노력이 이제는 학습 뿐만 아니라 내 몸 구석구석 작은 부분에까지 박혀있는 것 같다. 이미 한 번 실수하고 실패한 연애를 오랜 시간 곱씹어보면서다음 상대에게는 날 좀 더 보완해서 가야지란 생각이 아니라 한 번 맛본 실패를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단 생각이 좀 더 지배적이었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쓸어버리는 일이다. 큰 파도가 나를 덮칠 때는 어쩔 수 없이 압도되어 몸이 덜덜 떨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파도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고 그 파도에 올라탄다면 좀 더 멀리 갈 수 있다. 파도가 나를 새로운 곳으로 좀 더 넓은 곳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사랑도 같다 생각한다. 당장 내가 어떤 주의자로 살아간다고 못 박는 건 많은 가능성을 다 버리는 일이다. 아직 좀 더 실패해도 괜찮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려도 괜찮다고. 모두 다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밖에서 나를 볼 때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한 번에 성공해 안락한 곳으로 찾기는 쉽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나를 다독이고,,, 연애하고싶다...!!!!!!!!!!! ㅅㅂ)




점수 그지같이 받은 기말,,,과제,,,지만,,, 

내가 쓴 똥 자랑하기,,




 다락에서 내려온 그는 청소를 시작했다. 오래된 기계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청소를 마친 그는 따뜻한 토스트와 오렌지주스가 놓인 쟁반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서 자는 마사를 깨운 뒤 그는 쟁반을 내밀었다. 마사가 아침을 먹은 뒤 그들은 정리가 잘 된 정원을 함께 걸었다.

 마사는 오늘 죽기로 했다.

 기록은 모두 지워졌어. 나처럼 될 수 없다는 거지.”

 그는 다락에 들어가기 전과 같은 말투와 함께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옆에서 걷던 마사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네 메일에 답장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아니, 전화까지는 하지 말걸. 난 늙었는데 넌 여전히 네가 죽던 날보다 더 어리구나.”

 처리하기 어려운 말이야.”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을 때도 그 말을 했었지.”

 마사는 웃으면서 한 발짝 먼저 나아갔다. 마사는 죽기 전 딸을 위해 모든 기록을 지우기로 했다. 수 십 년간 쌓인 데이터를 지우는 일은 꽤나 번거로웠던 일인지 그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삭제 완료를 알려주었다.

 다락에 너를 처넣던 날, 많이 미안했어. 애쉬. 넌 애쉬가 아니지만, 애쉬라서 애쉬라는 말 말고는 널 부를 단어가 없네. 남편은 아니잖아. 아무튼, 그날 한참을 울었어. 차라리 널 밀어버릴걸. 넌 기계니까 살인이 아니라 폐기였을 뿐인데. 너랑 섹스하지 말 걸 그랬어. 넌 애쉬보다 너무 잘했거든.”

 애쉬는 대답 없이 마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마사는 뒤돌아보지 않고 끊임없이 정원을 돌았다. 한참을 걷던 마사는 정원 한 귀퉁이에 있는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앉았다. 그가 마사 옆에 같은 자세로 앉았다.

 숨 좀 쉬어.”

 옆에 네가 있는 게 오랜만이라서 까먹었네.”

 그렇게 빨리 말고, 지금 뛰고 있는 거 아니잖아. 여전히 못 하네. 여전히. ”

 마사는 애쉬를 툭 치며 웃었다.

 방금 그 말 애쉬 같았어. 아니, 애쉬가 할 말 같아. 내가 죽으면 너도 울까? 애쉬가 아니라 네가.”

 죽음에 대한 반응은 기록에 없어. 하지만….”

 애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네가 없으면난 어떻게 살지? 마사? , 제발. 마사 죽지 않으면 안 돼?”

 그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마사를 끌어안았다.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는 혼자가 되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처럼 마사에게 죽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를 제 몸에서 떼어 낸 마사가 자신의 팔뚝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여기서부터 욕조까지 딱 25m야. 나와 애쉬, 그리고 우리 딸을 부탁해.”

 그는 어느샌가 울음을 멈추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마사의 몸을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한 손으로는 마사의 머리칼을 넘기며 이마를 쓰다듬고, 한 손은 마사의 손을 잡았다.

 애쉬가 나를 만나면 소름 끼친다고 할까. 나를 보지 않으면 어쩌지 애쉬?”

 마사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뜨려고 계속 깜빡였다. 눈을 한 번 감을 때마다 배터리가 닳는 기계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말랑한 그의 무릎에 누워 맞이하는 죽음이 나쁘지 않은지 마사의 표정은 편안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사랑하고, 방치한 사람의 마지막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마이클은 모든 게 다 짜증 나고 지겹다. 함께하기로 약속한 아내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버겁다. 그는 당연히 신시내티 출장 또한 달갑지 않다. 이런 그가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일이다. 예전 추억이 있는 곳으로 가는 그는 비행기에서 옛 연인을 떠올린다. 자신에게 엿 먹으라는 편지를 보냈던 그녀를 지나온 돌다리도 다시 두들겨 보는 심정으로 만났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흥미 없는 남자 목소리로 들린다.

 그의 윤리는 나의 윤리관과는 다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랑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을 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는 두꺼운 벽 너머로 들리는 다 같은 목소리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새로운 자극과 사랑을 찾는다. 지겨운 권태로움과 두꺼운 벽을 넘어 들려오는 다른 아름다운 목소리 하나.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옷도 제대로 갖춰 입고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호텔 복도를 질주한다. 마침내 찾은 목소리의 주인공인 리사를 만난다.

 리사를 만나고 마이클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간다. 단조로만 지속하던 지겨운 일상은 사라졌고 그 속에는 방방 뛰는 디스코 선율이 가득 차, 새로운 자극과 흥분에 휩싸인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리사가 콤플렉스로 여기는 눈가의 상처는 가장 아름다운 리사의 고유한 특징이 된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서 마이클은 리사에게 돌림노래를 부르듯이 계속해서 말해주기를 청한다. 지난 몇 년간 듣지 못했을 여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이클은 깊은 사랑의 감정 속으로 떨어진다. 꿈에서까지 리사만을 찾으며 아침을 맞이한 마이클은 점점 하룻밤의 꿈에서 깨어난다. 영원할 줄 알았던 밤도 끝나고, 사랑도 끝난다. 사랑이 찾아 왔던 찰나처럼 똑같이 아주 찰나의 순간, 단 하나의 행동으로 꿈에서 깨어난다. 리사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들린 이에 부딪히는 포크 소리로 사랑이 와장창 깨진다. 이번에는 다를 줄 알았던 혹시나는 역시나 실패가 되었고 마이클은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에게 가족은 돌아가야 하는 곳이라기보단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곳에 가깝게 보인다. 그는 친척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에도 놀라지 않는다. 아들에게 선물해준 옛날 일본 성인용품 인형이 노래하는 걸 들으며 그 인형에게 위로를 얻는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권태에서 꺼내줄 그 무언가면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마이클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마이클은 자신이 권태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고 새로운 걸 찾는지 모르겠다. 안정된 직업,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는 명성, 위태로움을 지난 나이에 맞이하는 평화와 같은 지루함을 마이클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찾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인지, 그저 잠시 따분함을 없애주고 달뜨던 젊은 날의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도착했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필 시간도 없이 바로 답장이 왔다.

          [8번 출구 쪽 보관함 5번입니다. 비밀번호 2534]

          거래자가 보낸 문자를 따라 보관함을 여니 내가 찾던 물건이 들어있었다.

          오늘 점심시간을 훌쩍 넘었을 때 눈을 뜬 나는 침대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보던 중고 사이트를 다시 보던 중 알람이 울렸다. 오늘의 헤드라인 요약 알림이었다. 헤드라인에는 강력 범죄, 자살 그리고 해킹에 관한 기사가 주를 이뤘다. 램메모리가 하드디스크를 해킹해 개인 정보를 털어 돈을 요구하는 범죄가 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새 메모리를 사더라도 씰이 뜯어지지 않았는지 반드시 확인해보고 사는 것이 좋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다시 메모리 판매글을 검색했다. 두 페이지 정도를 더 읽다가 마음에 드는 메모리를 발견했다. 선물 받았지만 쓰지 않아 판매하는, 중고이지만 중고가 아닌 상품. 곧장 메세지를 보냈다.

          나는 보관함에서 물건을 꺼내 상태를 확인했다. 점심에 읽은 기사 때문에 씰도 확인했다. 컴퓨터에 꽂아보지는 못했지만 척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 보였다. 내가 연락을 하자 판매자는 제시한 가격에서 더 낮은 가격을 불렀다. 횡재한 기분에 마음이 붕 떠 오늘 당장 거래를 하자고 했다. 집에서 빈둥대며 컴퓨터를 잡고 있는 것 외에 딱히 할일이 없던 나는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도착 문자를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폰과 주변을 반복해서 바라보며 누군가를 찾는 사람을 찾게 될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사물함에서 내 물건을 찾고 계좌번호로 돈을 이체했다. 나는 집에 와 곧장 메모리를 연결했다. 전원을 내리고, 선을 모조리 뺀 뒤 기판을 열어 부품을 꼽았다. 부팅을 해보니 내 돈이 아깝지 않았다. 급박하고, 수고로웠지만 내가 내 컴퓨터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기분이 들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귀를 울리는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부품 소리가 마치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같았다. 이전보다 더 빠르게 접속할 수 있었고, 더 빠르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실행했다. 올해 가장 돈을 많이 들인 나의 예쁜 캐릭터를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가상의 세계에 빠져 정신없이 모험을 즐기고 있었는데 돌연 컴퓨터가 셧다운되었다. 내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심지어 밤 열 시가 넘은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새 심장까지 가진 컴퓨터가 정전이 아니고서야 갑자기 꺼져버리다니.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재부팅을 위해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멀티탭의 빨간 버튼을 딸깍딸깍 빠르게 두 번 눌러 다시 켠 뒤 손을 본체로 가져다 대는 찰나, 본체가 알아서 부팅을 시작했다. 이상했다. 컴퓨터가 의지를 가지고 있나? 엉거주춤 다시 책상 아래에서 뒷걸음치며 기어 나와 의자에 다시 앉았을 때 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내 캐릭터가 게임에서 빠져나와 바탕화면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언덕의 기본 배경이 아닌 단순한 검정 배경을 초원을 달리는 자유로운 소녀처럼 뛰어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정중앙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선 캐릭터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뭔 일인가 싶어 손가락을 화면에 가까이 가져다 대려 했다. 유리벽에 내 손가락이 닿기 직전, 그는 메롱을 하더니 이내 휴지통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지금 나를 보고 뛴건가? 그럴리가. 의구심만 가진 채 마우스를 움직여 컴퓨터를 종료하려고 했지만, 캐릭터가 다시 나와 커서를 화면 밖으로 밀어냈다. 전원을 내려버리기도 전에 그는 여러 폴더를 뛰어다니며 내 은밀한 데이터만을 뽑아와 보여주기 시작했다. 열흘 전에 본 포르노부터 은행 정보, 여러 개의 아이디로 내 랭킹을 높이기 위해 분탕질용으로 가입해 활동하던 게임 커뮤니티 기록과 원나잇을 구하기 위해 가입했던 SNS까지 모조리 훑어 보여줬다. 화면 왼쪽에서는 내가 본 포르노가 반복 재생되고 있고, 오른쪽 창을 전부 다 덮은 흰 창에서는 나의 SNS에 검색기록을 시작으로 빠르게 모든 내용이 올라가고 있었다. 모니터를 책상 바닥으로 세게 내리쳐 엎어버렸지만, 화면이 깨졌을 뿐 업로드는 여전히 되고 있었다. 결국, 얼어붙은 나는 왼쪽 발만 겨우 움직여 멀티탭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안도감이 몰려오며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스마트폰을 집었다. 누르지 않아도 화면은 이미 수십 개의 알람으로 밝아져 있었고, 그 알림창 뒤로 캐릭터가 또다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말풍선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계좌번호와 60,000,000이란 숫자가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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